서울은 이러한 위협을 가하는 북한과는 불과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
남북을 가르는 비무장지대 양측에는 엄청난 살상무기로 중무장한 양진영이
살벌한 긴장 속에 대치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올림픽 개최지로는 생각하기 힘든 선택임이 분명했다. 이에 더
하여 한국에게는 실력 면에서 비교가 안 되는 라이벌 일본이 있었다. 나고
야를 개최지로 내세우고 나선 일본은 기반시설, 넘치는 자금력,
과거 도쿄 올림픽 개최 경험, 국제스포츠계에 막강한 인맥과 로비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면에서 한국은 라이벌이 안 된다고 단정지었다. 일본은 자기들의
88올림픽 유치를 기정사실화하고 대대적인 유치 성공 기념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정적인 시각은 한국 국내에도 팽배해 있었다. 유치에 성공할리도 만무하지만
유치한다 해도 턱없이 부족한 재원과 엄청난 시설건설에 따른 재정 적자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높았다.
올림픽 개최 후 막대한 적자 부담을 겪은 이전 개최국들의 낭패 사례들을 예로
들고 나왔다. 정부도 소극적 이었다. 그러나 국가 체면상 개최국을 결정하는
올림픽위원회 참가는 해야 했다. 승산이 없는 결과가 뻔했지만 누군가는 이
달갑지 않은 일에 앞장서야했다.
이 역할을 떠밀려서 맡게된 것이 정주영 회장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성사되게 하기 위하여 없는 길도 찾아 만들었다. 특유의
발상력과 기치를 발휘했다. 산재한 걸림돌들을 디딤돌로 만들며 유치 작전에
앞장섰다. 그는 이런 논리를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