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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壽衣는 어떤 옷인가

원고리 2014. 7. 13. 21:56

<살며 생각하며>   壽衣는 어떤 옷인가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
송우혜/소설가

평생토록 전력을 다해 성심껏 한길을 가신 분들에게는 절로 뿜어져 나오는 깊은 내공이 있다. 오래전 한 잡지사의 원고 청탁 때문에 인터뷰해야 했던 복식 연구가 석주선 교수님 같은 경우가 그러했다.

“보통 ‘종이 천 년, 포(布) 오백 년’이라고 하는데 말이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작은 전율을 느꼈다.

종이는 ‘천 년’을 가는 반면, 헝겊은 아무리

오래 간다고 해도 ‘오백 년’에 불과하다는

세상살이의 이치가 그 짧은 경구 속에 어찌 그리도 간결하고 명쾌

하고 인상적으로 축약돼 있는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날 석 선생님에게서 들은 ‘헝겊의 세계’는 매우 다양하고 신기

했다. “헝겊이 지닌 자연수명 때문에 현재 고려시대 옷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고려’라는 나라가 지녔던

시대적 원근의 정도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석 선생님의 말씀 가운데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수의(壽衣)’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의의 본래 뜻은 ‘염습할 때 시체에 입히는

옷’이다.

 

그런데 수의를 통해서도 각 시대 복식의 특징을 연구하신다는 말

씀을 듣고 사물을 다각도로 바라보는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

수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절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건 우리나라 수의 제도가 매우 특이하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데서 비롯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수의’는 관행상 옷의

형식이 특별하게 정해져 있다.

 

고인의 시신에 조선조 관복(官服) 비슷한 형태의 길고 치렁치렁한

옷을 여러 겹으로 겹쳐서 입히고 머리에는 헝겊 관을 씌운 차림

으로 입관한다.

 

문제는 그런 옷은 고인이 평생토록 단 한 번도 입은 적이 없고,

또 그런 걸 입어보려고 평소 생각해본 일조차 없는 형태의 옷

이라는 것이다.

옷 모양새로 말하자면 현재 우리 사회의 수의는 고인과 유족이며

친지들에게 전혀 낯선 것은 물론이고, 돌아가신 분의 생애와

연결되는 부분이 전혀 없는 옷이다.

 

그런데 왜 굳이 그처럼 낯선 옷을 만들어서 고인에게 입히는 것

일까. 수의는 ‘고인이 저세상에 가서 입는 옷’이기도 하다는 옛날

식 믿음에 따른다면, 돌아가신 이들은 살아생전 단 한 번도 걸쳐

보지 않은 낯설고 이상한 옷을 입고 저승살이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 큰 문제는 그런 형태의 수의를 만들기 위해서 들어가는 돈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저렴한 수의라 해도 보통 100만 원 이상

이고, 최고급 안동포로 만든 수의 중에는 1000만 원이 넘는

것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장례식을 치르는가? 서구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례식 장면을 보면, 고인에게 평소 입던

옷을 단정하게 입히고 뚜껑을 열어놓은 관 속에 누인 모습으로

산 사람들과 이별 의식을 치른 뒤 관 뚜껑을 닫고 그대로 매장한다.

 

서구사회로 이민 간 친지들이 그곳에서 가족의 장례식을 현지 관행

대로 치른 경험담을 들어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서구사회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수의’를 새로 마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사회 역시 예전에는 지금의

서구사회와 마찬가지 형태의 장례 문화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있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조선조 후기의 학자 이긍

익(1736∼1806)이 쓴 유명한 사서인데,

 

거기 기록된 선조 때 명신(名臣)이었던 백사 이항복(1556∼1618)에

관한 기술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그가 말년에 자손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죽으면 염습할 때 관복

(官服)을 입히지 말고 심의(深衣)를 입혀라”고 했기에 그렇게 장례를

지냈다는 것이다.

 

심의는 국어대사전에 ‘높은 선비의 겉옷. 흰 베로 만드는데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가를 두름’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로

보아 그 시대에는 장례 지낼 때 관리 출신들은 평소 입었던 관복을

입혀서 장례 지냈는데,

 

이항복은 관복을 입고 저세상에 가는 대신 ‘높은 선비’의 차림새로

가고 싶어서 굳이 자신의 시신에 심의를 입혀서 장례 지내라고

유언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옷’은 곧 그 사람의 신분과 사회적 계급을 그대로 드러

내는 가장 가시적인 매개체로서 입는 데 매우 엄중한 제한이 있었다.

 

그러나 매우 특별한 날에는 그런 제한을 뛰어넘는 특별대우가 용인

되었다. 그래서 평민 집안끼리 치르는 지체 낮은 혼례식일지라도

신부는 왕실의 공주가 큰 행사 때 입는 대례복(大禮服)인 ‘활옷’과

같은 격식으로 만든 화려 찬란한 옷을 입었고, 신랑은 당당한 큰

관리의 복장인 화려한 관복 차림의 옷을 입었다.

추정컨대, 아마 장례식 때도 마찬가지 특혜가 주어졌던 것 같다.

그래서 평민도 관복 형태의 수의를 입고 저세상으로 가는 것을

용인해 주었던 전통이 연년세세(年年歲歲) 강고하게 유지되어

온 결과, 현재 보는 것과 같은 매우 기이한 형태의 수의 문화가

정착된 듯하다.

그러나 이젠 ‘관리’가 가장 선망하는 직책이었던 왕조시대도 아니

고, 더구나 ‘조선조 관복’ 비슷한 모습의 수의가 고인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줄 수 있는 시절도 아니다.

 

이제는 문자 그대로 무의미한 허례허식이자 매우 불합리한 낭비로

전락한 우리 사회의 ‘수의 문화’를 바르게 개선할 때가 되었다.

 

출처 : 문화일보 7 월 10 일字

출처 : boseong51
글쓴이 : 조 쿠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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