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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진호 전투 없었다면? 문재인, 이북서 태어났다!

원고리 2014. 11. 20. 22:40

장진호 전투 없었다면?  문재인,  이북서 태어났다 !

국가보훈처 3억원 예산 결국 반액으로…예산 중요도 모르나

 

전경웅, 최유경 | orange@newdaily.co.kr
 

 

 

 

"꼭 서류까지 내팽겨쳐야 절반이라도 준답니까?"

 

한 국가유공단체 관계자의 발언이다. 18일 장진호 전투 기념비 예산은 1억

5천만원 배정으로 일단락 됐다. 당초 국가보훈처에서 낸 3억원에서 절반

으로 줄어든 것이다.

 

이 마저도 박승춘 처장의 적극적인 항의가 아니었다면 받아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보훈처 측의 입장이다. 지난 13일 국회 정무위 예산신사 소

위원회는 장진호 전투 기념비 예산 3억원을 전액 삭감했다.

 

이미 관련 기념비가 미국내 3개나 있다는 게 이유였다. 보훈처는 총 사업비

6억원(한국5억원, 미국1억원)으로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에 기념비를 건립할

계획이었다.

 

알링턴 국립묘지는 박근혜 대통령이 워싱턴 방문 첫 일정으로 찾았을 정도로

우리나라에 의미가 깊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

번영한 것도 그들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라며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알링턴 국립묘지의 방문객은 1년에 300만명에 달한다. 알링턴 방문객이 1년

500만명인데, 알링턴을 찾는 사람 2명 중 한 사람은 국립묘지를 찾는다는

뜻을 의미한다.

 

장진호 전투는 6.25 전쟁 중인 1950년 11월27일에서 12월11일 사이 함경남도

장진호(湖)에서 미군 1만8,000명이 12만 중공군에 맞서 싸운 전투다. 총 7,000

천명의 사상자가 났으며 생존자의 3/4은 후유증에 시달렸다.

 

미군의 희생으로 우리가 얻은 것은 상당했다. 중공군의 남하 속도가 지연되면서 

이른바 '흥남 철수'로 우리 국군과 유엔군 10만명의 퇴각이 이뤄졌다. 9만명에

달하는 민간인들도 북한을 벗어나 남하에 성공했다.

 

'흥남 철수'로 지난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북한을 탈출

했다. 문 의원의 양친은 함경남도의 항구도시인 흥남에서 대대로 살다가 1950년

12월 거제도로 가는 피난길에 올랐다.

 

전시 중에도 민간인을 배에 태워 부산 거제도로 피난 시킨 것은 유례없는 일

이었다. 문 의원의 부모님은 거제도 포로 수용소 근처 명진리 남정마을에

자리를 잡았고 문 의원은 1953년 1월 24일에 태어났다.

 

 

보훈처가 기념비를 추진한 것은 우리 손으로 감사의 뜻을 기리고 싶었던 마음

에서다. 현존하는 기념비는 미국 단체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예산이 증발하자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정우택 국회 정무위원장을 찾아가

서류를 내팽개치며 항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처장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

냐"며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바닥에 던지고 탁자를 손으로 내려쳤다고 한다.

 

이 해프닝으로 여야는 싸잡아 박 처장의 처신을 비난했다. 결국 박 처장은 정무위

전체회의에서 "죄송하게 됐다"며 공개사과를 했다. 여야 의원들은 기념비 추진의

당위성을 묻는 대신, 박 처장이 국회를 무시했다고 강하게 밀어부쳤다.

 

강기정 새정치연합 의원은 "오만방자한 행태에 국회의원으로서 창피하고 모멸

감을 느낀다"고 했고, 새누리당 김태환 의원은 "박 처장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예산 3억원이 전부 반영됐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와 관련해 한 새누리당 의원은 "야당이 무조건 반대한다고 해서 밀리면 안된다.

내용을 살펴야 한다. 한해 국가 예산이 얼마인데 3억원 기념비 예산을 없애려

하느냐"면서 "그날, 그 전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어땠을 지

각성해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美 해병대의 피눈물이 서린 장진호 전투

박승춘 보훈처장이 여야 의원들에게 한 목소리로 비난을 받게 된 이유는

64년 전에 있었던 한 전투 때문이다. 바로 장진호 전투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1950년 12월 13일까지 함경남도 장진호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는 세계 전쟁사 가운데 ‘3대 혹한전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참혹했다. 

 

당시 중공군은 이미 모든 전선 북쪽에서 물밀 듯이 내려오고 있었던 반면,

유엔군은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유엔군 사령부는 참전한 중공군의 수를 3만 명 내외로 추산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중공군이 30만 명이나 한반도에 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함경남도 장진호 일대에서는 유엔군의 퇴로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은 美해병

1사단이 10배가 넘는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 공격을 받게 됐다. 

 

한편 나머지 중공군 18만 명은 서부 전선을 맡고 있던 美8군을 공격, 유엔군을

후퇴하게 만들었다. 결국 美해병 1사단을 포함한 유엔군은 철저히 포위된 것이다. 

 

美해병 1사단이 전투를 벌인 곳이 남부 지역이었다면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

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곳은 함경남도 산악지대였다. 당시 장진호의 기온은

영하 30도 아래까지 떨어지고 강풍이 불어 체감온도는 더욱 낮았다.

 

전투식량은 물론 땔감과 약품마저 얼어붙는 날씨였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 美해병 1사단은 美10군단과 한국군 1군단 등 유엔군 10만여 명이

철수할 시간을 벌기 위해 방어선을 사수해야만 했다. 약 3주 동안의 전투에서

美해병 1사단은 전체 병력 1만 2,000여 명 가운데 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부대가 괴멸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조지 워싱턴의 독립 전쟁 때부터 활약했던 美해병대 사상 처음으로 부대가 전멸

당하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이후 ‘장진호 전투’는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전투로 미국에 알려졌고, 그 생존자들은 ‘Chosin Few(장진호 전투의

생존자)’라 자칭하며 죽을 때까지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美역사상 가장 뛰어난 저널리스트로 평가받는 뉴욕 타임스의 데이비드 핼버스

탬이 2007년 4월 탈고한, 자신의 책 제목을 ‘콜디스트 윈터(Coldest Winter)’로

 짓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장진호 전투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책은 1950년부터

1951년 사이 ‘가장 추웠던 겨울’을 취재한 르포다. 

 

장진호 전투는 이처럼 미국에서는 그 참혹함과 美해병대의 영웅적인 투지

때문에 유명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들의 희생으로 성공한 흥남 철수 때문에

유명하다. 

 

흥남철수는 당초 美10군단과 한국군 1군단이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피해

물자와 병력을 철수시키려던 계획이었다. 하지만 수십만 명의 피란민이

여기에 합세하면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때 민간 상선인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피란민을 실어 나르기로 결정해 수

많은 한국인이 무사히 빠져 나오게 됐다. 다른 배들도 군인은 물론 민간인을

태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1950년 12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흥남에서 부산 등 남해안으로

유엔군 병력과 피란민 10만 명을 무사히 철수시켰다. 피란 도중에 ‘메러디스

빅토리’ 호 위에서는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기도 했다.


 

장진호 전투의 주인공인 美해병 1사단은 괴멸 직전의 상황에서도 흥남 철수를

성공시키기 위해 끝까지 중공군을 막았고, 12월 24일 마지막 배로 철수했다. 

 

이때 부모의 뱃속에 있었던 사람이 한때 대선후보였던 문재인 새민련 의원이다.

문재인 의원 스스로도 이 점을 자랑스럽게 밝힌 바 있다. 즉 장진호 전투는 ‘정치

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과 미국, 북한, 중공 현대사의 또 다른

뿌리가 된 ‘국제적인 역사’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장진호 전투의 美해병 1사단과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없었다면, 김씨 일가에게 '인권유린'을 당하면서 살았을 뻔 했던 사람 중 한

명이 문재인 새민련 의원이라는 말이 된다.

 


출처 : boseong51
글쓴이 : 조 쿠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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