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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월하정인

원고리 2013. 1. 2. 20:56

      - 그림은 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

 

 

 

  

 

 

                           月下情人(1)


                                                             
                                                                                                                                           - 여강 최재효

 

 

 

 

  달빛이 한여름 밤의 산길을 회색으로 물들이고 그 회색 길을 숨을 몰아쉬며

두 여인이 걷고 있었다. 앞서 걷는 젊은 여인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자주

소매로 훔치며 이지러지는 달을 바라보았다. 이전에는 달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 밤에는 달이 마치 자신의 앞날을 예견이라도

하듯 자주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다가 다시 젊은 여인에게 나타나곤 했다.


 나이가 가 좀 들어 보이는 여인은 종종 걸음으로 젊은 여인 뒤에 바짝 붙어서

걷고 있었지만 나이 차에서 오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

쉬어가자고 할 수도 없었다. 두 여인은 무엇에 쫓기는 것처럼 자주 뒤를 돌아

보았지만 자신들을 따라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주막에서 저녁을 간단히 해결하고 계룡산의 험준한 골짜기를 쉬지 않고 걸

었다. 앞서 가던 젊은 여인이 뒤를 돌아보며 헉헉거리며 뒤 따라오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등짐을 지고 보퉁이를 끌어안고 뒤 따르는 여인이 측은해 보였다.


  “유모, 저기 바위에서 잠시 쉬었다 가요. 무척 힘들어 보여요.”
  “마마, 쇤네는 괜찮아요. 그냥 가세요. 아직도 한참을 가야하고 밤도 꽤 깊은

것 같은데요.” 

  땀으로 목욕을 한 것처럼 유모라 불리는 여인은 위 아래 옷이 흠뻑 젖어 있

었다. 말은 괜찮다고 하면서 메고 있던 짐을 얼른 바위에 내려놓았다.


  “유모, 이제는 마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그냥 아기씨라고 불러요.”
  “공주마마, 어찌 감히 아기씨라는 여염집 호칭을 부를 수 있겠나이까?” 


  “나는 이제 공주가 아냐. 아버지의 명에 의해 폐서인 된 마당에 공주는 무슨

 공주. 괜찮으니 아기씨라 불러요.”
  “마마, 어찌......”
  “유모, 난 괜찮으니 그냥 아씨라고 부르래도요.”
  “......”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달이 다시 얼굴을 내보였다. 옷은 비록 여염집 여인

들이 입는 치마저고리를 걸쳤어도 젊은 여인의 얼굴은 감히 함부로 범접

할 수 없는 고귀함이 어려 있었다. 산길 주변 숲 속에서 소쩍새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은 잠시 눈을 감고 며칠사이에 자신에게 일어났

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아직도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세희야, 이 밤으로 대궐을 빠져나가야 한다. 안 그러면 내일 너는 이승의

 목숨이 아니야. 이 어미가 사람을 시켜 네가 어디 먼데 가서 평생 숨어 사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금은보화를 마련해 놓았다.”
  어머니인 정희왕후(貞熹王后)는 당돌하게도 아버지의 패덕을 고한 딸이

안쓰러우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통탄하고 있었다.


  ‘아, 어미로서 딸 아이 목숨 하나 보전치 못하니, 내가 어찌 어미라 할 수 있

으리오.’
  “어마마마, 소녀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아버님의 눈 밖에

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소녀 이 궁궐에서 죽겠습니다. 그러니 더는 아무 말씀

하지 말아 주세요.”


  “네가, 네가 정녕 이 어미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냐? 제발

부탁이다. 이 어미의 청대로 오늘 밤 이 궁궐을 나가 멀리 계룡산 동학사로

떠나거라. 내 사람을 보내 그곳 주지 스님께 연통을 넣을 터이니 이 어미

말대로 하거라. 그것만이 너와 내가 이승에서 모녀지간의 연을 이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다. 제발 이 어미의 청을 들어 주거라.”


  “어마마마. 으흐흐흐흐…….”
  “언니, 어마마마의 말씀대로 하세요. 그것만이 우리 동기간이 정을 이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부디 어마마마의 청을 물리치지 마세요.”


  왕비 윤 씨의 곁에 있던 세희공주의 동생 의숙공주는 중전 윤 씨를 거들었

다. 평소 언니 세희공주의 학식과 미모에 눌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던 동생

이었다. 그러나 언니 세희공주가 임금의 자리에 앉은 아버지 수양(首陽)에게

전 왕을 폐위시키고 권좌에 앉은 패덕(悖德)을 고했다가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죽음에 이르자 언니가 한편으로는 측은해 보였다.


  “어마마마, 소녀 잘못한 것이 없사온데 야반도주를 하시라니요? 소녀 아버

님의 손에 궁궐에서 죽겠습니다.”
  “이것아, 네가 이 어미가 죽기를 원하는 것이냐?” 


  “언니, 어마마마 뜻에 따르세요. 먼 훗날 아버님의 노여움이 어느 정도 가라앉

으면 다시 입궐하면 되잖아요.”
  세희공주는 불같은 성격의 아버지, 수양이 자신을 절대로 그냥 놔두지 않으

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바마마, 하늘에는 해가 하나여야 하옵니다. 헌데 조선의 하늘에는 해가

둘이옵니다. 아버님은 해가 아니옵니다. 찬위한 금상을 상왕(上王)에게 돌려 주

시옵고 아버님 손에 목숨을 잃고 구천을 헤매고 있는 억울한 원혼들을 달래주세

요. 그것만이 아바마마께서 천대만대에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방도입니다.

부디 소녀의 청을 뿌리치지 마소서.”


  수양은 딸의 간언(諫言)을 처음에는 그냥 넘기려 하였으나, 점점 그 도가 지나

치자 서서히 노여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희는 들어라. 너는 아비의 일에 대하여 이 시간 이후로는 왈가왈부하지 말

거라. 아녀자는 아녀자의 길을 걸으면 되느니라. 아무리 아비라 하지만 더는

너의 말을 듣고 싶지도 않거니와 이미 토설한 내용도 참기 어려우니 이 아비의

마지막 충고를 깊이 새길지어다.”

   수양은 딸 세희 공주의 영민함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행적에 대하여 비수를

들이대는 딸이 미웠다.


  “아바마마, 아직 늦지 않았나이다. 피비린내 나는 왕위를 돌려주시고 그간의

 잘못을 참회하소서. 소녀, 죽어도 뜻을 굽히지 않겠나이다.”
  “어허, 네가 무얼 안다고 감히 이 아비를 가르치려 드느냐? 방자한 것 같으

니라고.”


  수양은 노발대발하면서 마시던 술잔을 세희공주를 향해 집어 던졌다. 옥으로 된

술잔이 공주의 머리를 맞고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 났다. 사색이 된 내관이

얼른 달려와 깨진 잔 조각을 치웠다. 세희공주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그러나 세희공주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아버지 수양을 똑바로 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아버님은 세종 할아버님 이후로 태평성대를 구가해온 왕실과 조정에

피바람을 일으키고 백성들에게 근심을 안겨주었습니다. 있지도 않은 역모를

핑계로 안평숙부를 강화도로 귀양 보내고 김종서 대감과 황보인 대감 등 내로라

하는 이 나라의 충신들을 척살하셨습니다. 역모를 꾸민 세력은 안평숙부와

충신들이 아니라 칠삭둥이 한명회와 권람 등 기생충 같은 자들과 아바마마

아니옵니까?”


  “뭣, 뭐라고. 네 이년! 아무리 너와 내가 부녀지간이라 하나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느니라. 네 년이 아무리 공주의 신분이라 하나 너 역시 아비의

신하이니라. 여봐라, 이년을 당장 하옥시켜라. 날이 밝는 대로 국문을 열어  죄

를 엄히 물으리라.”


  수양은 주안상을 엎어버리고 큰 딸, 세희공주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금방

이라도 박살낼 태세였다. 지밀전 상궁들과 내관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

하고 있을 때 중전 윤 씨가 왕의 침전 안으로 들었다.

 

 세희공주가 상감의 침전에서 아버지 수양에게 그간의 잘못을 간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은 왕비 윤씨는 상감의 침전 밖에서 부녀지간의 언성이 오가는 것을

듣고 있었지만 침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상감의 언성이 높아

지자 중전은 더 참지 못하고 상감이 침전으로 들었다.


  “상감, 참으세요. 어린 아이가 무얼 알겠어요. 그냥 상감을 위하는 뜻에서

한 말이니 노여움을 거두세요.”
  “세희공주는 어서 물러나 중궁전으로 가 있어라.” 


  수양은 다시 큰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단숨에 들이켰다. 노여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갑자기 수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눈이 빨갛게 충혈 되면서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중전도 짐에게 따질 일이 있으신 게요?”
  “상감, 따질 일이라니요? 세희가 그만 세상 물정을 몰라서 한 말이니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밤이 깊었으니 그만 침수 드시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자식 농사를 잘못 진 게 틀림없나 봅니다.”
  “상감, 무슨 말씀이세요?”


  “몰라서 묻는 게요? 어찌 딸년이 아비에게 두 눈 똑바로 뜨고 대들 수 있

단 말이오? 어떻게 아이들을 훈육하시었기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

까? 저 아이를 그냥 둘 수 없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치죄(治罪)해야 겠습

니다.”


  중전 윤 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던지 상감의 노여움을

풀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몸에서 난 딸 세희공주는 목숨을 부지하

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잔병치레가 많던 공주였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비상하고 서책(書冊)을 늘 곁에 두고 지내는지라 모르는 것이 없어

할아버지 세종대왕은 손녀인 세희공주를 특히 귀여워했다.


  “상감, 아무리 세희가 상감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해도 상감의 딸 아닙니까?

소첩이 별도로 불러 훈육시킬 테니 너그러이 용서하세요.”
  “중전은 누구의 편이요?”
  “상감, 누구 편이라니요? 지아비와 자식사이에 무슨 편을 들고 말고 할 일

이 어디 있답니까?”
  “나는 그 아이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소.”


  “상감, 그 아이는 몸도 성치 않고, 성격이 상감을 닮아 한번 마음먹은 일은

 꼭 하고야 하는 성격이잖아요. 며칠 말미를 주세요. 소첩이 단단히 타일러

상감께 용서를 빌도록 할 테니까요.” 


  “필요 없어요. 난 딸자식 하나 없는 셈 칠 테니 그리 아세요.”
  “상감......”
  중전도 노여움이 극에 달한 수양을 어쩌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아아, 이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더냐?’
  중전 윤 씨는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지아비 수양에게 손수 갑옷을 입혀

준 야망이 큰 여인이었다. 윤 씨는 지아비 수양이 대권을 쥐는데 일조한

여인으로 시아버지 세종임금 밑에서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시아주버니인,

붕어한 문종(文宗) 임금은 아우인 수양대군의 야망을 간파하고 수양의 식솔

들이 궁궐에 출입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숱한 우여곡절과 피를 뿌린 광풍이 휘몰아 친 뒤 조카를 허울뿐인 상왕

(上王)에 앉히고 금상의 자리를 차지한 지아비 수양이었다. 고진감래

(苦盡甘來)라고 했다지만, 중전의 마음은 늘 좌불안석이었다. 언제 상왕을

지지하는 숨어있는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 자신의 혈육인 세희공주가 분란을 일으킨 것이다. 천근

만근 같은 걸음으로 중궁전으로 돌아 온 중전은 세희공주를 타일러보려고

하였지만 고집불통이었다.


  반달이 막 모습을 감춘 밤, 경복궁의 동쪽 문이 열렸다. 이미 중전의

밀지를 받은 궁궐수비대장은 어둠을 틈타 두 여인과 한 남자를 안전하게

궁궐 밖으로 빠져 나가도록 조치를 취해주었다. 평민복장으로 갈아입은

세희공주와 30후반의 유모, 철릭을 걸친 젊은 무장(武將)등 세 사람이

 조용히 대궐문을 나섰다. 한양의 밤거리는 칠흑 같은 어둠에 고요했다.

 종종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올 뿐이었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재빨리 경복궁을 빠져나와 육조(六曹) 거리를

지나 광통교(光通橋)를 건넜다. 한양의 밤하늘은 낮아 손을 뻗으면 동서

를 길게 흩 뿌려져있는 은하수가 잡힐 듯 했다. 세 사람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칼을 찬 무장이 앞서서 걷고 공주와 유모가 뒤 따라 걸었다.

대부분의 상가들은 문이 굳게 닫혀있고 만취한 주정꾼들이 골목길 아무 곳

에서 소피를 보는 모습이 보였다.


 자시(子時) 이후에는 통행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지라 백성들의 발걸음

은 눈에 띄지 않았다. 종종 긴 창을 든 서너 명의 순라꾼들이 지나가곤

했다. 그때 마다 젊은 무장은 얼른 두 사람을 골목길로 안내하여 몸을 숨기

도록 했다.


  세희공주는 아버지 수양이 권좌에 오르기 전 궁밖에 살았기 때문에

한양의 번화가를 자주 구경 다니곤 했다. 비록 달이 없는 어두운 밤거리

지만 가리가 눈에 익었다. 한 식경 후 멀리 숭례문이 보였다. 무장이 품속

에서 무언가 꺼내더니 숭례문을 지키던 무장에게 보여주자 경계를 서던

군관이 군호를 붙이며 깍듯하게 경례를 하였다. 세희공주 일행은 쉬지

않고 남쪽을 향해 걸었다.  


  앞서 걷던 무장이 공주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자주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땅 바닥만 쳐다보고 걷던 세희공주는 서서히 멀어지는

경복궁 쪽을 돌아보았다. 공주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있었다. 공주가 뒤를

돌아보자 등짐을 지고 보퉁이를 끌어안고 걷던 유모가 얼른 수건을 꺼내

공주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공주마마, 힘드시면 잠시 쉬어 갈까요?”
  “아니야, 유모. 난 괜찮아요. 쉴 곳도 없는 데요.”
  주변을 둘러보아도 마땅히 쉴만한 장소가 눈에 뛰지 않았다. 새벽이라

모든 집뿐만 아니라 상가들의 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어쩌다 마주친 주막도

문을 닫아 세 사람이 쉴만한 장소는 없었다.


  “공주마마, 날이 밝기 전에 강을 건너셔야 합니다. 중전마마의 지엄한

분부가 계셨습니다. 힘드시더라도 참으셔야 하옵니다. 소인은 공주마마께서

무사히 강을 건너도록 도와 드릴 것입니다.”


  젊은 무장은 세희공주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중전의 뜻을 전했다. 공주는

생전 이렇게 오래 밤길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또한 몸이 허약해 그동안

어머니 중전 윤 씨의 지극한 간호를 받고 있었다. 엊저녁에도 상궁이 가져온

보약을 마셨었다. 세희공주는 한기(寒氣)를 느끼며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지

만 이를 악물고 참고 있었다.


  ‘그래, 이제 나는 조선국의 공주도 아니고, 이 한양하고는 오늘로 인연을

 끊는 거야. 영원히 나는 아바마마와 모녀의 인연을 정리하는 거야. 오늘

밤을 마지막으로......’ 


  “공주마마, 추워 보이세요?”
  “유모, 이제 난 공주가 아니야.”
  “네에?”


  “이제부턴 일개 여염집 아녀자로 살아가야 돼.”
  “공주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


  공주는 대답 대신 한숨만 쉬었다. 멀리 흥인문 쪽으로 별똥별 하나가

길게 꼬리를 감추었다. 개들 짖는 소리도 잠잠해 졌다. 저녁나절 비가 온 탓

으로 움푹 파인 길에는 물이 고여 있어 헛디디면 신발이 모두 빗물에

적었다. 발바닥이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세희공주는 이를 악물었다.


  ‘아아, 어찌하다가 내 신세가 이리 되었단 말인가? 일국의 공주가 어쩌

다가 야반도주하는 신세가 되었더란 말이더냐? 으흐흐흐......’ 


  세희공주가 절룩거리며 흐느끼자 유모는 가슴이 미어졌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손에서 자라온 공주였다. 비록 자신이 몸에서 나온 자식은 아니었

지만 유모는 공주의 눈물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공주마마, 울지마셔요.”
  유모와 젊은 군관에게 들킬까 걱정되어 속으로 흐느끼던 세희공주는

유모가 속내를 알아버리자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으흐흐흐 흐흑......”
  “공주마마, 울지마셔요. 몸도 성치 않으신데......”


  “유모.”
  “네에, 공주마마.”
  “차라리, 내가 왕실이 아니라 여염집 여식으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그렇다면 이렇게 야심한 밤길을 걷는 일도 없을 테니

까요.”
  간신히 말을 마친 세희공주는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공주마마, 마마께서는 아직 이 조선국의 공주이십니다. 누가 뭐라

해도 조선국의 상감마마의 장녀 이십니다.”
  “공주가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이렇게 아바마마의 눈을 피해 야반

도주하는 처지인걸요.”


  “상감마마께서 언젠가는 공주마마를 다시 부르실 겁니다. 아시다

시피 상감마마께서는 성정이 불같으면서도  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언젠

가는 꼭 공주마마를 다시 부르실 겁니다. 그때까지 옥체 보존하시고

계시면 반드시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공주마마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아니에요, 난 이제 공주가 아니에요. 영원히 아바마마와 인연의 끈을

 끊고 살 겁니다.”
  “공주마마, 안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기다리셔야합니다.

 세월이 약이랍니다. 그저 모든 것 잊고 사시면 반드시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마마, 어서 서둘러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날이 밝기 전에

노량진에 도착해야 하옵니다.”


  무장이 고개를 반쯤 숙이고 세희공주에게 아뢰었다. 세희공주가

다리가 아파 절뚝거리자 젊은 무장은 난감해 했다.
  “공주마마, 소신이 마마를 업고 가겠습니다. 소신에게 업히십시오.” 


  무장이 공주 앞에 꿇어앉으며 등을 내보였다. 여염집 처자도 아닌

한 나라의 공주체면에 생전 처음 보는 젊은 남자에게 업힌다는 것은

도저히 스스로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공주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몸은 무엇이든지간에 의탁하고 싶었다.


  ‘그냥 체면이고 뭐고 다 팽개쳐 버리고 업힐까?’
  서너 식경을 쉬지 않고 걸어 온 공주의 발목은 시큰거리고 한기에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늑한 궁궐 생각이 간절했다. 어마마마와

상궁들의 보살핌 속에 온갖 호사를 누려온 공주는 하룻밤 사이에 도망

자의 처지가 된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더 이상 걷기가 힘들었다.

공주의 걸음걸이가 점점 느려지고 절룩거리는 정도가 심했다.

 

  “공주마마, 소신의 등에 업히소서. 더 이상 무리하시면 옥체 상하실까

걱정되옵니다.”
  젊은 무장이 공주 앞에 등을 대고 앉았다.
  ‘그냥 모른 체 하고 업힐까?’ 


  “공주마마, 소신의 등은 바위덩이같이 단단하고 안전하나이다. 안심하시고

업히소서.”
  공주가 주저하자 젊은 무장은 공주를 안심시켰다.


  ‘아, 이렇게 편한 것을......’
  젊은 무장은 감히 공주를 업었다는 사실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밤길을 걸었다.

공주의 하체에서 따뜻한 온기가 젊은 무장의 손에 전해졌다. 무장은 묘한 감정

에 몸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감히 지존이신 상감마마의 혈육인 공주마마를

자신의 등에 업었다는 사실에 감격해했다. 무장은 힘든 줄 모르고 혼자 걸을

 때 같이 빠른 속도로 노량진 맞은편 강나루를 향해 달렸다.


 두 식경을 걸었어도 젊은 무장은 전혀 지친기색이 없었다. 용산 쯤 왔을 때

하늘이 다시 컴컴해지기 시작했다. 무장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날이 새기

전에 공주를 한강을 건너 노량진까지 안전하게 모셔야 했기 때문이다. 대궐을

떠나기 전 중전 정희왕후의 지엄한 명이 무장의 귓가에 맴돌았다.


  "세희공주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날이 밝기 전까지 한강을 건너야 하오."
  "소신, 중전마마의 지엄한 명을 한 치 어긋남 없이 수행하겠나이다. 안심

하소서."


  대궐 수비군 중에서 가장 무예에 뛰어나고 발 빠른 무장은 힘을 내 걷기

시작했다. 공주 일행이 골목길을 지날 때 마다 개들이 짖어댔다. 거의 강에

다다른 듯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무장의 이마에 송알송알 맺힌 땀방울을 식혔다.


  "잠시 쉬어가시지요? 힘드실 텐데……."
  세희공주가 자신을 업고 뛰다시피 걷는 무장에게 속삭였다.
  "아니옵니다. 공주마마. 어서 강을 건너야 하옵니다. 곧 비가 내릴 것 같습

니다."


  "……."
  '아니 무슨 남자가 저리 힘이 좋단 말인가? 쉬지도 않고 서너 식경을 걸어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으니…….'


  유모는 뒤뚱거리며 무장의 뒤를 따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렵게

강에 도착한 공주일행은  나루터가 아닌 곳에 도착하여 수풀이 우거진

곳에 몸을 숨겼다. 강가에 세 사람이 탈 배는 없었다. 젊은 무장은 공주와

 유모를 안심시킨 뒤 강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젊은 무장은 두 사람

이 겨우 탈수 있는 쪽배를 구해왔다.

 

  “공주마마, 어서 타소서. 간신히 나루터에 매어져있는 배를 가져왔나

이다.”
  "어머나, 그럼 주인 몰래 훔쳐왔단 말이 예요?"
  "공주님을 무사히 건네 드리고 다시 그 자리에 배를 가져다 놓으면 됩

니다. 잠시 빌린 것이지요."

 

  무장이 공주의 옥수(玉手)를 잡고 공주가 안전하게 배에 타도록 하였다.

몸집이 큰 유모가 앉고 세희공주를 안도록 하였다. 무장이 천천히 노를 젓기

시작하자 쪽배는 잔잔한 한강의 물살을 갈랐다. 안개가 자욱하게 강 위에

퍼져 한치 앞을 보기가 힘들었다.

 

 쪽배가 강 중간쯤 건너자 바람이 불었다. 파도가 약하게 일어도 쪽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를 탄 세희공주는 욕지기를 느끼

면서 현기증이 일었다.

 

  “유모, 토할 것 같아요.”  “마마, 조금만 참으셔요. 배 멀미를 하시나

봅니다. 조금만 더 가면 노량진이옵니다.”  유모는 공주의 등을 다독

거려주었다.

 

  ‘아아, 어지럽고 속이 미식 거려 죽겠는데, 남정네 앞에서 토할 수도

 없고......’ 

 “공주마마, 송구하옵니다. 소신이 얼른 배를 저어 강을 건너겠습니다. 조금

만 참고 견디세요.”

 

  강바람이 불어 올 때 마다 배가 흔들렸으나 세희공주는 욕지기를 이를

악물고 참았다. 여름 강바람은 시원하면서도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어

서 얼굴에 물방울이 생기게 하였다. 건너편 노량진에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

다.

 

 그러나 그곳은 한양을 방비하는 군사들이 있는 곳이어서 그쪽으로 배를

댈 수 없었다. 무장은 노량진에서 양화나루 방향으로 한참을 더 내려가 수풀이

우거진 곳에 배를 댔다. 공주 일행이 배에서 내리자 서쪽 하늘에서 천둥이

치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공주마마, 부디 옥체를 보존하옵소서. 소신 더 이상 공주마마를 모시지

못한 죄 두고두고 속죄하겠나이다. 부디, 부디 옥체를......” 

 

 젊은 무장은 비록 잠깐이지만 공주와의 인연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세희공주는 경복궁에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모시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소임을 다한 젊고 헌헌장부인 무장이 고마웠다. 욕심 같아

서는 멀리 동학사까지 자신의 긴 여정에 동행토록 하고 싶었다.

 

  “무사님, 고마워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황공하옵니다.

공주마마.” 

무사는 공주에게 큰 절을 올렸다. 공주는 끼고 있던 옥가락지를 빼어 무장

에게 건넸다.

 

  “이것은 무사님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인연이 닿으

면 먼 훗날 뵙도록 하겠습니다.”

 

  “공주마마. 부디 옥체 보존하소서. 소신 공주마마의 은혜를 죽을 때까지

 잊지않겠나이다. 조금만 더 가시면 주막(酒幕)과 민가(民家)가 나타날 것입

니다. 마마께서 밤새 걸으시느라 많이 피곤하실 것입니다. 좀 쉬었다 가시

옵소서.” 

 젊은 무사는 감격하여 다시 세희공주에게 큰 절을 올렸다.

 

  “공주마마, 아니 아기씨, 어서 가세요. 혹시 상감께서 보낸 병사들이 뒤쫓아

올지도 모릅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그래요. 유모. 어서가요.”

 

   공주와 유모가 강 언덕을 향해 오르려고 할 때 갑자기 뇌성벽력이 쳤다.

공주는 다시 강을 건너는 무장이 걱정되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배는 이미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잠시의 인연이었지만 잘 생긴 무장의 얼굴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세희공주가 지니고 있던 것이 가락지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노여움으로 보아 다시는 대궐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 같으면서

도 먼 훗날 자신이 궁궐로 돌아올 경우 무장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

옥가락지를 뽑아 주었다. 

 

   “제발 무사님이 무사히 강을 건너가셔야 할 텐데. 나무 석가모니불.” 

공주는 두 손을 합장한 채 비바람에 파도가 일렁이는 강을 속으로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아기씨,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 무장님은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 나갈

늠름하고 강한 사내입니다. 다시 대궐로 돌아가 중전마마께 공주마마의 무사

탈출을 고할 것입니다. 이제부터가 걱정이옵니다.”

 

 

 

 

 

 

                                                                             - 계속 -

출처 : 좋은사람들 사랑과나눔
글쓴이 : 행복세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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