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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延安)은 황해도(黃海道)에 있는 고장으로 고구려 때 동음홀(冬音忽) 또는 시염성이라 부르다가 신라 때 해고군 (海皐郡으로 개칭하였다. 그후 고려에서는 염주(鹽州)·영응현(永膺縣)·복주(復州)·석주(碩州)·온주(溫州) 등으로 고쳐 내려오다가 충선왕(忠宣王 : 고려 제 26대 왕, 재위기간 : 1309 ∼ 1314) 때 연안부(延安府)로 하였으며, 1914년 이웃 백천군(白川郡과 합하여 연백군(延白郡)이 되었다.
연안 김씨(延安金氏)의 시조는 고려 명종(明宗 : 제 19대 왕, 재위기간 : 1170 ∼ 1197) 때 사문박사(四門博士 : 국자감 안에 두었던 교육기간의 정8품 벼슬)를 지낸 김섬한(金暹漢)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신라에 김알지(金閼智)의 후예인 두왕자가 왕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형은 북빈경(北濱京 : 지금의 강릉)에, 아우는 시염성(연안의 옛 지명)으로 유배되었는데, 아우의 후손이 바로 김섬한(金暹漢)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선조(先祖)의 유배지인 연안(延安)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면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조선 중기(朝鮮中期)의 명문대가(名門大家)로 일컬어졌다.
시조 섬한(暹漢)의 5대손 도(濤)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올라 전주 사록(全州司錄)·정언(正言)을 거쳐 1371년(공민왕 20) 명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동창부 구현승(東昌府丘縣丞)에 올랐으나, 이듬해 노친봉양(老親奉養)을 이유로 사퇴하고 귀국하자 공민왕(恭愍王)이 [나복산인 김도장원]이란 여덟자의 글을 써서 하사(下賜)했으며, 그가 살던 곳은 [팔자동(八字洞)]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세도가문으로써의 기틀을 다졌는데, 맏아들 자지(自知)는 조선 태종(太宗) 때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고 음양(陰陽)·천문(天文)·지리(地理)·음율(音律)·의약에 이르기까지 능통했으며, 둘째 여지(汝知)는 1389년(창왕 1)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예조 좌량(禮曹佐郞) 등을 역임하고 선이 개국되자 판관(判官)·헌납(獻納)을 거쳐 태종(太宗) 때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러 1416년 (태종 16)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공조(工曹)와 예조(禮曹)의 판서(判書)로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던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의 정 2품 벼슬)을 겸직했고, 셋째 치지(致知)는 예빈시윤을 지냈으며, 막내 학지(學知)는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세조(世組)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된 원신(元臣)은 파주 현감(坡州縣監)과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를 역임하고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우신(友臣)은 성종(成宗)의 잠저(潛邸) 때 사부(師傅)였던 인연으로 그가 즉위하자 호조 참의(戶曹參判)에 발탁되어 1490년(성종 21)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부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뒤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연안 김씨는 우신(友臣)의 아들 심(諶)·흔·전(詮) 3형제가 크게 명성을 떨쳐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혔는데, 1479년(성종 10)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한 심(諶)은 사관(史官)과 부제학(副提學 : 홍문관의 정3품 당상관 벼슬)을 거쳐 연산군(燕山君) 때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었으나 어지러운 정국을 개탄하여 불취하고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랐으며, 흔은 어려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부교리(副校理)·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다. 그리고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전(詮)은 호당(湖堂 : 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연산군(燕山君)때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고,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연루되어 남해로 유배당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大司憲)·좌찬성(左贊成)·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우의정(右議政)을 거쳐 1520년(중종 15)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청백리(淸白吏 : 청렴결백한 벼슬아치)에 뽑혔다. 한편 부사(府使) 면(勉)의 아들 근사(謹思)는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감(勘)은 중종반정(中宗反正) 에 가담하여 정국이등공신(靖國二等功臣)으로 연창부원군(延昌府院君)에 봉해지고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으며, 석철(錫哲)은 중종(中宗) 때 무과(武科)에 장원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후 궤장을 하사(下賜)받아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장(名將)으로 이름이 높았다.
중종(中宗) 때의 명신(名臣) 희락당(希樂堂) 안로(安老)는 가문의 중흥을 가져온 중추적인 인물로서 1506년(중종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혔고 대사간(大司諫)·부제학(副提學)·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한 후, 아들 희(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한 뒤부터 권력 남용이 잦아 당시 권신(權臣) 남 곤(南 袞)·심 정(沈 貞) 등의 탄핵을 받아 경기도 풍덕(豊德)에 유배되었으나, 1529년(중종 24)풀려나와 도총관(都摠管)·판서(判書)·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조선말기(朝鮮末期)에 와서는 정조(正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익과 그의 아들 재찬(載贊 : 순조 때 영의정을 역임), 유연(有淵 : 재찬의 손자로 고종 때 우의정을 역임)이 뛰어났으며, 통덕랑(通德郞) 재혁(載奕)의 아들 후(순조 때 대사간에 이름)와 재칠(載七)의 아들 준(정조 때 좌참찬·좌부승지를 지냄)은 정조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선(銑), 순조(純祖) 때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고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날린 위와 함께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을 이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연안김씨(延安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16,689가구, 68,9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 김종대카페
글쓴이 : 김종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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