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 자락이 끝나는 성북동 기슭에 자리한 길상사(吉詳寺). 이곳은 한 때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 대원각이 있었다. 대원각은 군사문화의 서슬이 시퍼렇던 60년대 말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최고급 요정이었다.
이 절은 대원각 요정의 주인이었던 김영한(불명 吉詳華)이 죽기 전 법정스님에게 기증하여 절로 탈바꿈한 곳이다.
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자리에 세워진 사찰인 길상사의 이름은 그녀의 법명인 길상화(吉詳華)에서 따서 길상사로 명명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김영한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미로 극락전이라 한다.
대원각 소유자인 김영환 보살이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대원각의 모든 것을 시주하려고 하였지만 무소유를 강조하며 실천하는 법정스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었다.
몇 번의 간곡한 요청으로 법정스님은 '길상사'라는 절을 세워 마음의 도량을 세운다.
김영환 보살은 1932년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진향 기생으로 시작하여 어느 날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인 백석(白石)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기나긴 사랑의 기다림을 가진다.
그녀는 명문가였던 백석 집안의 반대로 인연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헤어져 있으며, 시인 백석을 내 사랑으로 간직하며 죽는 날까지 그를 기린다.
하룻밤의 사랑으로 서로의 마음을 간직한 채 백석은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한지에 써서 편지와 함께 남기고 홀로 월북의 길을 떠나간다.
당나라 이태백의 중국의 변방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이 등장하는 '자야오가(子夜五歌)'라는 시에서 이름을 따 왔다는 자야(子夜)는 길상사라는 절을 열 때 법정스님으로부터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과 염주 하나를 받아든다.
백석과의 못다 한 사랑을 간직한 채 자야는 성북동 배밭골인 지금의 터에서 '첨암정'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한다.
수많은 정치인과 단골의 구애를 뿌리치고 첫사랑을 기다리며 다시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하다.
백석이 북으로 떠나면서 그와 이별한 그녀는 백석을 잊기 위해 대원각을 냈다는 소문이고, 백석이 죽도록 보고싶으면 그녀는 줄담배를 피워댔다고 한다.
그래서 폐암이 발병하고 죽음이 임박하자 자신이 운영하던 시가 1천억 원의 요정은 절에 무보시 시주하였다. 또한, 자신이 모았던 2억 원의 현금은 생전에 기리며던 백석 시인을 위하여 '백석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내사랑 백석-1995년 문학동네>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창작과 비평>을 출간했다. 그녀는 국악계에도 공헌을 했으며 김진향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1999년 11월 14일 그녀는 사랑의 그리움만 간직한 채 길상헌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죽기 전날 그녀는 목욕 재계하고 절에 참배하고 하룻밤을 길상헌에서 자고 임종하였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앞마당에 뿌려졌다.
84살의 적지도 많지도 않은 일생을 살다간 자야의 하룻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 첫사랑으로 간직한 젊을 적의 백석을 그리워하며, 가진 것 없이 모든 것을 희사한 무보시를 한 기쁨으로 가볍게 이승을 훌훌 털고 생을 마감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