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 개신교

[스크랩] 103위 순교성인의 삶을 기리며

원고리 2013. 9. 21. 22:56



1.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71~1846) 한국교회의 첫 번째 신부로서 거룩하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신앙과 활동력으로 빛나는 일생을 보냈고 죽음 또한 빛나고 장렬한 것이었다. 1821년 충청도 솔뫼, 구 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김 대건은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드러내 나(모방) 신부는 마침내 그를 다른 소년 두 명과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 때는 1836년, 그의 나이 15세일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최 양업 (崔良業, 토마스), 최 방제 (崔方濟, 프란치스코: 수학 중 병사) 등 두 소년과 함께 6년간이나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현지에서 발생한 민란 때문에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어쨌든 신학 공부를 하던 그는 기회가 오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어 우선 요동지방에 와서 대기 중이던 고(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입국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그는 1743년 음력 11월, 변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때마침 북경으로 가던 김 프란치스꼬를 만나 고국의 박해 소식을 듣는다. 그의 말인즉 국내에는 아직 박해 위험이 남아있을 뿐더러 선교사의 거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만큼 그들의 입국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으로라도 입국할 것을 결심하고 혼자서 국경을 넘어 의주까지 잠입했다. 김 대건은 의주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포졸에게 발각되어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피해 요동으로 되돌아왔으며 한편 북경으로 갔던 김 프란치스코는 국경에서 그 이듬해 김 대건과 다시 만나고 주교의 입국 시기를 음력 11월로 잡고 헤어졌다.

그러는 동안 김 대건은 부제품을 받았고 약속 시기에 마중 나온 김 프란치스꼬 일행과 같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 고 주교는 동반치 않았다.

김 부제는 서울에 들어오자 수개월에 걸쳐 오직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만반 준비를 갖추는 데 진력했고 마침내는 10여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신품을 받아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후 갖은 고난을 겪어가며 고 주교와 안(다블뤼) 신부를 배로 모시고 황해를 건너 조선 땅인 강경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약 2개월 간 휴식 후 곧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김 신부가 성사를 집전한 곳은 서울과 용인지방이었으며 당시의 교우들 증언에 따르면 김 신부는 활발한 성격에 얼굴은 고아하고 허위대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모친과도 상봉하여 얼마간 같이 머무를 수 있었으나 1846년 음력 4월이 되자 주효의 명에 따라 황해도지방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구라파로 보내는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하는 길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이 황해도 지방에의 항해길이 마지막 그의 순교길이 되고 말았다. 그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곳 관에서는 중국 배들을 쫓으려고 때마침 조선 배를 징발 중이었는데 김 신부의 "양반 배를 어찌 징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도화선이 되어 결국 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김 신부는 그곳에서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문초 끝에 교회 일이 드러나자 마침내 서울 좌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중국 배에서 압수된 주교 편지가 "네 글씨와 다른데, 누구의 것이냐"라는 문초에 "철필과 새털로 쓴 글씨는 다르기 마련이며 철필이 있으면 이렇게 쓸 수 있다"는 말로 위기를 넘기는 기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그의 넓은 견식과 당당한 태도는 대관들로 하여금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는 말들을 하게끔 했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 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김 신부의 처형은 9월 16일 새날터에서 모든 것이 군문효수의 절차에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너희들도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피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41은 부친)

2.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 정하상은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한 분인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로, 외국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신명을 바쳐 일했고 유명한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했던 주님의 참된 용사이다. 그는 또 덕행과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 범 (앵베르) 주교에 의해 이 신규(李身逵)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했으나 박해로 인해서 신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정 하상은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申酉迫害)로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와 이복형인 정철상(丁哲祥, 가롤로)이 순교하자 가산을 몰수당한 채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몸붙일 곳이 없게 된 하상은 하는 수 없이 고향인 양근 땅 마재로 내려가 숙부인 정 약용(丁若鏞)의 집에 의지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13년 홀로 상경하여 조증이(趙曾伊,바르바라)의 집에서 기거하며 교리를 배우고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고 그후 더욱 깊게 교리를 배우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유배 중인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다시 상경,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였다.

1816년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가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갔으며 그곳에서 북경 주교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후에도 조신철(趙信喆,가롤로), 유진길(劉進吉,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나(모방) 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9년 7월 모친 유소사(柳召史,체칠리야), 동생 정정혜 (丁情惠,엘리사벳)와 함께 체포된 정 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 일뿐더러 그후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정하상은 포청에서의 6차례 신문과 형벌을 받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또 3차의 형문을 당한 후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9월 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49의 아들이며 54의 오빠, 49, 54, 57과 함께 체포됨)



3. 성 이호영 베드로 (1803~1838) 이 호영은 경기도 이천(利川) 출신으로 신유 박해 후 어머니와 과부가 된 누나 이 소사(아가타)와 함께 입교했다.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이사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으며 이 때문에 유방제 (柳方濟)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l815년 2월 (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누나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고 참아내어 결국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 결안(結案)의 사학죄인(邪學罪人)이라는 문구에 대해 천주교는 사학이 아니라 정도(正道)이며 거룩하고 참된 도(道)라 수결(手決)할 수가 없다고 버티자 포졸들이 강제로 수결시켰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4년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누나 이 소사와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1838년 11월 25일 (음력 10월 8일) 긴 옥살이 끝에 얻은 병과 옥고로 옥사(獄死)했다. 그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7은 누나)



4. 정국보 프로타시오 (1799~1839) 정 국보는 원래 개성(開城)의 유명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으나 벼슬을 하던 조부가 죄를 짓자 부친과 함께 상민으로 신분을 감추고 상경하여 선공감(繕工監)에서 일하며 미천하게 살았다. 천성이 선량하고 겸허했으므로 30세 경 천주교를 알게 되자 곧 입교하여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고, 그후로는 홍살문 근처에서 아내와 함께 성사를 받으러 상경하는 시골 교우들을 돌보았는데 자녀 14명을 가난과 병으로 잃어버렸고. 자신 또한 가난과 병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인내와 극기의 신앙자세를 잃지 않아 모든 교우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4월 (음력 3월) 밀고되어 아내와 함에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의 형벌과 고문은 참아냈으나 형조에서는 참아내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그러나 석방되자마자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형조에 들어가 배교를 취소하며 다시 체포해 달라고 간청했고, 그것이 거절당하자 5월 12일 (음력 3월 그믐) 고문의 여독과 염병으로 들것에 실린 채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형조판서에게 직접 자신을 체포해 줄 것을 요구, 그날로 체포되어 5월 20일(음력 4월 7일) 포청에서 곤장 25도를 맞고 이튿날 새벽에 순교했다.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5.성녀 김아기 아가타 (1787~1839) 김 아가타는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전혀 신앙을 모르고 살다가 친정언니의 열심한 권면으로 늦게 천주교를 알게 되어 교리를 배웠는데 기억력이 나빠 12단(十二端)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지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하였다.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교리를 배우던 중 1836년 10월 김 아가타는 김업이 막달레나, 한 아기 바르바라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교리에 대한 질문에 김 아가타는 "나는 오직 예수, 마리아밖에 모릅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했고,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후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 갇혀 있던 교우들은 예수,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 아기가 왔다고 그녀를 반겨 맞아 주었다. 그후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 아기는 형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 한 끝에 옥중에서 대세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니 그때 나이 53세였다.(8, 10과 함께 체포됨)



강원도 강촌(江村) 출신의 박 안나는 서울의 한강변에 살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머리가 둔해 교리를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으나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했다.
18세 때 비교적 부유한 교우 태문행(太文行)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고 또 정성껏 그들을 교육시켰다.기해 박해 초인 1839년 4월 박 안나는 남편,큰아들 응천(應天)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의 고문으로 남편과 큰아들은 배교 하고 석방되었으나 박 안나만은 배교를 거부하고 혹형과 고문을 이겨냈다.

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 나왔으나 언제나 평온하였고 때때로 위문오는 가족들에게도 권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되어 서도 형관이 배교하고 석방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가라고 유혹하며 혹은 위협하 고 고문하였으나 박 아기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 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57세였다.
이 아가타는 경기도 이천(利川) 출신으로 17세 때 결혼했으나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 동생 이 호영과 함께 입교하였다. 아버지가 대세 (代洗)를 받고 사망하자 동생을 따라 서울로 이사하였다.

1835년 2월 (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동생 이 호영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여인으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형벌과 고문을 참아냈고 형조로 이송되어 동생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옥살이를 더 해야 했다.

고통스러운 옥중 생활 속에서도 동생과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위로 하고 격려하며 인내와 극기로써 생활하였다. 동생을 먼저 순교의 영광을 입게 하고 자신은 동생이 옥사한지 7개월 후인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5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3은 동생)
김업이 막달레나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본래 수정(守貞)을 원했었는데, 혼기에 이르러 어머니의 권유로 교우 청년과 결혼했다.중년이 되어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노모와 함께 애고개 (지금의 아현동)에서 망건을 만들어 팔며 살았다.

항상 노모에게 순종하는 좋은 표양과 밝은 교리지식으로 외교인들에게 전교 하며 순교할 결심으로 수계하던 김 업이 막달레나는 1836년 10월 김 아기 아가타,한 아기 바르바라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김업이 막달레나는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참아내고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이 유예되어 3년을 옥살이한 끝에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자신의 소원대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66세였다. (5, 10과 함께 체포됨)
일명 '치문'으로도 불리는 이 광헌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여러 순교자를 낸 광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에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으나 30세 경 입교한 후로는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여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거듭되는 박해로 이 광헌은 가산을 전부 잃고 순교할 때까지 10여 년을 궁핍 하게 살면서 회장직에 충실하고 또 냉담자를 권면하고 병약자를 위로하며 외교인에게 전교했다. 그리고 범(앵베르)주교와 신부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 들여 교우들을 미사에 참여케 하고 강론을 듣게 했다.

1839년 기해박해 초 어떤 예비 교우가 체포된 자기의 아내를 석방시키는 조건 으로 이 광헌을 포함한 53명의 교우 명단을 포졸에게 건네주었다. 이로인해 이 광헌은 4월 7일 전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 형문을 마친 후 4월 18일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로 이송된 이 광헌은 배교하면 가족들과 함께 석방시켜 주겠다는 형관의 유혹을 뿌리치고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 다리가 부러지고 살이 터져 온 몸이 피범벅이 되었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냈다.

형조에서의 혹독한 3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후 5월 24일 남명혁(다미 아노)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26은 처, 58은 딸, 21은 동생, 20, 21, 26. 58과함께 체포됨)
한 바르바라는 어려서 교우인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세속의 일에 마음이 빠져 어머니의 모범과 권면을 무시하고 외교인과 결혼했다.그러나 우연히 친정에서 만난 김업이(막달레나)로부터 교리를 다시 배우게 되었고, 30세에 남편과 세 자녀를 모두 여의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1836년 10월 김아기(아가타), 김업이(막달레나)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형관에게 천주십계를 강론하고 의연히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한 후 1839년 5월 24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그때 나이 48세였다.(5. 8과 함께 체포됨)...(펌)

출처 : 가톨릭동호회
글쓴이 : 귀연햇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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