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찰

[스크랩] 미암사와 쌀바위,무량사와 김시습..

원고리 2014. 1. 26. 23:37

 미암사-충남 부여군.내산면 저동리 21-5    

                          

 

 

미암사 안내

부여에서 서쪽 보령 방향으로 국도40호선을 따라가다 내산면 소재지를 조금 지나면

저동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왼쪽으로 금북정맥에 해당하는 계향산 중턱에 미암사라는 조그마한 절이 있다.

미암사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백제 무왕(武王) 4년(602년) 관륵(觀勒)이

창건(創建)하였다고 전하여지며, 쌀바위 전설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점을 볼 때 월명산의 금지사와 같이 주민들의 기도처로써 암자형태로 백제시대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고 본다.

미암사는 의자왕 20년(661년)에 당라연합군이 백제를 침범하면서 미암사를 전소(全燒)시켜

버리는 바람에 대웅전(大雄殿)에 봉안(奉安)되었던 금동관세음보살상(金銅觀世音菩薩像)을 인근(隣近)의 야산에 몰래 매장(埋葬)하여 보존하였다고 하나 현재 문헌(文獻)을 찾을길이 없고 그 위치를 정확히 알지못하여 안타깝게도 찾지 못하고 있다.

주지이신 석만청 스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해병대 출신이신 스님께서 한국불교에서 최초로 공산화된 월남에 가서 파월중에 돌아가신장병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대제를 지내고 오셨는데 그때 본 남방불교 와불에서 영감을 얻어 와불을 조성했다고 한다.

 

 

 

 

 

 

 

 

 

쌀바위 전설

 

부여 저동리 쌀바위는 바위로는 보기 드물게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충남문화재자료 제371호다. 절 이름과 바위가 직접 관련이 있고 바위의 색과 형상도 그럴싸하여 더욱 관심을 끈다. 음경석?촛대바위?부처바위라고도 불리는 이 바위에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한 노파가 대를 이을 손자를 얻기 위해 날마다 이곳에 와서 정성껏 불공을 드렸다.

어찌나 열심히 기도를 했는지 집에 쌀이 떨어진 사실도 모를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관세음보살이 꿈에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호리병에서 쌀 세 톨을 꺼내며 말하기를 이 쌀 세 톨을 바위에 심으면 하루 세 끼 먹을 쌀이 나올 것이다.”라 하였다.

노파가 꿈에서 깨어보니 정말 바위에서 쌀이 나왔고 얼마 후에는 그토록 바라던 손자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노파는 점점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더 많은 쌀에 욕심이 난 노파가 부지깽이로 쌀이 나오는 구명을 후벼 팠다. 그러자 구멍에서 쌀이 나오지 않고 핏물이 흘러 주변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이때부터 절 이름도 미암사米巖寺라 했다고 한다. 지금도 바위 전체가 흰 데 비해 바위 아래쪽은 전설처럼 피가 물든 것처럼 붉은색이다. 이 바위를 보면 흔히 ‘차돌바위’라 불리는 석영류로 이루어져 있다.

표면은 하얀색으로 반질반질하고 붉은색은 풍화로 착색이 된 것으로 보인다. 쌀바위는 원적외선이 나와 몸에도 이로우며 혈액순환 등 건강에 좋다고 한다.
예전부터 이곳은 영험이 있어 사람들이 치성을 드리는 곳으로 알려져 왔다.

언제부턴가 이 바위에는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는 이야기가 있어 교훈을 준다.

백제시대에 처음 지어진 절로 알려진 미암사는 이 쌀바위로 인해 절 이름까지 얻게 되었으니 그만하면 족한 듯하다.

 

 

 

 

 (무량사)-김시습.부여군 외산면 만수리116

무량사 일주문 - 만수산 무량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극락전 내에는 거대한 좌불(坐佛)이 안치되었는데 중앙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좌고(坐高)가 16자, 가슴둘레 24자이며 좌우의 관세음(觀世音)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각 좌고가 16자에 가슴둘레가 18자이다. 또한 여기에는 석가불화(釋迦佛畵)가 있는데 길이 45자 8치, 폭이 25자 2치나 되는 조선 인조 때의 불화로 기구(機構)가 장대(壯大)하며 묘법(描法)도 뛰어나고 채색도 선명하다.

 

천년고찰 아미타 기도도량 부여 무량사(無量寺)소개

충남 부여군 외산면(外山面) 만수산(萬壽山)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인 무량사(無量寺)는

신라시대에 창건하였고, 여러 차례 중수(重修)하였으나 자세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주위의 산림(山林)이 울창하여 거찰(巨刹)의 면목을 유지하고 있는데, 보물 제356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드물게 보는 2층 불전(佛殿)으로 내부는 상 ·하층의 구분이 없는 조선 중기의 건물로서, 당시의 목조 건축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밖에도 경내에는 보물 제185호로 지정된 5층석탑, 보물 제233호인 석등, 지방문화재인

당간지주(幢竿支柱), 김시습 부도(金時習浮屠) 등이 있다.

이 절은 또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세상을 피해 있다가 죽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무량사극락전 소조아미타삼존불

 

 

불전 안에는 가운데에 아미타불(5.4m)이, 양쪽에 관세음보살(4.8m)과 대세지보살(4.8m)이 있는데, 이 아미타삼존불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불로서는 동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어깨는 당당하나 상호가 사실성 없이 평판적이며 옷주름 등은 도식성을 보여,

단순해져 가는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여 준다. 본존불의 손이 매우 큰데 한 손은 올리고

한 손은 무릎에 내린 채 양쪽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구품인 중에서

중품중생인을 나타내고 있다. 보살상은 전대에 견주어 영락 장식은 줄어든 편이나 보관이 매우 화려해지는 모습이 또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성을 내보이고 있다. 불상의 복장 유물에서 발원문이 나와 이 불상이 1633년에 흙으로 빚은 아미타불임이 분명히 밝혀졌으므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예가 되었으며, 아울러 극락전 건물도 같은 시기에 지었을 것으로 짐작하게 되었다

 

 

 

 

 

 

 

무량사 영산전

 

 

 

 

 

무량사 우화궁

 

무량사 우화궁은 극락전 좌측에 있는 건물로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화'란 부처님 계신 곳과 대중 앞에 만다라화 등 꽃들이 비 오듯 쏟아졌다는 『법화경』「서품」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정면 좌측에서 4번째 칸 창방에 ‘우화궁’이란 현판이 걸고,

좌측과 전면의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다. 우측벽에는 인방재 사이 벽면에 불교고사를 그렸다

 김시습 초상화 소개

 

김시습의 성품과 인간관을 잘 드러내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10년이 넘은 오랜 은거 끝에 잠시 서울에 머물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에 서강(西江)을 지나다가 어느 벽에 붙은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글을 보게 되었다.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이 시를 보고 그는 선뜻 붓을 들어 '부'(扶) 자를 '망'(亡)자로, '와'(臥) 자를 '오'(汚) 자로 고쳐 버렸으니
다음과 같이 되었다
靑春亡社稷 白首汚江湖(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방랑길에 나선 시습은 서북지방으로부터 만주벌판에 이르렀다가 다시 동으로 금강산을 거쳐, 남쪽 경주에 이르기까지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경주 남산,

당시 이름으로는 금오산에 은거해서 지은 것이 금오신화(金鰲新話)이다.

금오신화는 소설 다섯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속세의 명리를 좇지 않고 순수한 인간 그대로를 보여 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니 김시습이 추구하던 인간상들이 그려져 있다고 하겠다. 이 10년 은거 동안에 그는 당대를 꼬집는 글들과 많은 시편을 써 남겼으니 지금 남아 있는 매월당집 23권 중에 15권이 시로 2,200여 수에 이른다

47세 되던 해(성종 12년, 1481)에는 또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다시 부인을 맞아들이기도 했으나 이듬해에 조정에서 윤씨의 폐비 논의가 일어나는 것을 보자 또 모든 것을 버리고 속세와의 인연을 끊었다. 그리하여 유랑 끝에 다다른 곳이 이곳 무량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는 "네 모습이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에 너를 버릴지어다"라고 자신을 평가하기도 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그가 지은 [김시습전]에서 "재주가 그릇 밖으로 넘쳐흘러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으니
그가 받은 기운이 지나치고 중후함은 모자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면서도 다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품성을 듣는 사람들은 겁쟁이도 용동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이 되고 남음이 있다"고 평가하였으니 뜻을 펼 세상을 만나지 못한 지식인의 처지를 참으로 적절하게 표현한 듯하다.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할 때에 화장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하여 3년 동안 시신을 두었다가

장사를 지내려고 열어 보니 그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아서 마치 살아 있는 듯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부처가 되었다고 하여 화장을 하니 사리 1과가 나와서 부도를 세우고 안치하였고 한다

 

 

 

무량사 극락전

무량사 극락전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56호로 지정되었다.

하층은 정면 5칸에 17.14m, 측면 4칸에 12.23m이며, 상층은 정면 3칸에 12.23m, 측면 2칸에 7.34m의 중층 팔작지붕이다. 외관상으로 보면 중층이나 내부는 상하층의 구분 없이 하나로 통해 있다.

 

 

무량사 오층석탑

 

 

무량사 오층석탑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85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7.5m. 하기단(下基壇) 너비 5.2m.

2중의 기단 위에 세워진 5층의 사각 석탑으로, 기품은 웅대·장중하며 결구(結構)에 특색 있는 수법을 보였다.

옥개가 넓다거나 상층기단 갑석의 받침을 만든 수법, 각부 부재를 다른 돌로 한 점 등은

부여정림사지5층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서, 지역적인 영향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석탑은 많은 양식을 절충하였으나 잘 조화된 것으로, 만든 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보물들의 도열 - 석등, 오층석탑, 극락전 

무량사 석등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3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법당 앞뜰의 무량사5층석탑(보물 185)

바로 앞에 있으며 이것은 원래의 위치로 추정된다.

하대석(下臺石)은 측면부분까지 파묻혀 있어 지대석(地臺石)의 형태는 물론 그 유무도 알 수 없으나,

하대석 측면이 8각이었음이 시굴(試掘)에서 밝혀졌다. 하대 상부는 원형 연화대(蓮華臺)로

8잎의 겹꽃잎 복련(覆蓮: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이 조각되어 있으며,

맨 위에는 1단의 각형(角形) 받침을 새겨 8각 간주(竿柱)를 받치게 하였다.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는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의 양쪽에 서서 이를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대부분 두 기둥만 남아 있다.

이 당간지주는 무량사 천왕문 동쪽에 남아 있는 것으로, 두 개의 길다란 돌기둥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기둥 끝은 안쪽면에서 바깥쪽으로 둥글게 다듬었고, 앞뒷면의 가장자리에는 테두리 선을 돌렸으며,

양 옆면 가운데에는 세로로 돌출된 띠를 새겼다.

마주보는 기둥의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2개의 구멍을 각각 뚫어 놓았다.

돌기둥 사이에는 당간 받침돌이 끼워져 있는데, 그 중앙에 당간을 받치는 기둥자리를 파고

그 주위를 둥글고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통일신라시대에서 굳어진 제작방식을 따라 고려 전기에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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