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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정희 와 K I S T

원고리 2014. 12. 29. 19:33

박정희 와 K I S T

 

 趙甲濟

 

한국을 세계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만든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런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아래 사진처럼 수백억 원을 들여 기념

관을 세웠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기념관이 없어서 박 정희 대통령이 세운

KIST출신 과학자 들이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세우기 위해 23일 건립

사업단을 발족한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야당 의원이 박정희 영웅시

한다고 힐난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며 ..국민이 이런 국회의원 성토해야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임명을 받은 초대 김병희 이사장지금 97세인데도
매일 매년365일 인터넷 원고를 보내고 365일 1년 원고를 제본하여 매년

초에 발송하고 있다.

 

금년 초에는 96옹 논설집을 보내왔고 2015년 초에는 97옹 논설집이 오리라

기대하며 국민이 본을 보도록 권합니다. 아래 대통령 기념관들 사진과

박정희 대통령과 KIST 관계를 첨부 합니다

▶초대 소장이었던 고(故)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전국 30여
곳을 둘러본 뒤 대통령에게 서울 홍릉 임업시험장을 연구소 부지
1순위로 보고했다. 농림부는 펄쩍 뛰었다.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농림부 장관을 데리고 홍릉으로 가 "임업

시험장도 중요하지만 과학기술 연구소는 더 중요하다. 38만 평을

모두 연구소에 내줘라"고 했다.

KIST에 첫 예산 10억 원을 배정할 때도 경제기획원이 예산을
깎으려 하자" 원하는 만큼 다 주라"며 KIST 손을 들어줬다

박정희 와 KIST

 

1965년 한국이 베트남전 파병을 결정하자 미국은 감사의 표시로 1000만
달러를 원조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밀가루 한 포대가 아쉽던 때였다.
정부 내엔 "부족한 식량을 수입하는 데 원조 자금을 우선 배정해야 한다"
는 주장이 많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미국의 1000만 달러와 우리 정부 출연금
1000만 달러를 합쳐 대한민국 공업 발전에 기여할 종합연구소를 세우자는
거였다.
그렇게 해서 이듬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탄생했다.

 

 

대통령 기념관 - 有口 無言
 

 

거제 김영삼 전 대통령 기록 전시관


광주 김대중 전 대통령 컨벤션 센타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도서관

 

 

노무현 전 대통령 기념관은 현재 추진중
▲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화산 봉수대 아래 봉하마을 소재)
▲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건국 대통령 기념관
(이화장 : 이승만 대통령이 거처하던 집)

 ▲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초라한 서제와 낡은 타자기

 

 

"나는 [朴正熙]란 이름 석자로 족하다"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號도, 명예 博士도 거부했던
그는 권력을 빙자한 군림(君臨)을증오한 이였다.
 
朴正熙 정부의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낸 金聖鎭씨에
따르면故 朴 전(前) 大統領은 號가 없었다고 한다.
 
고령 朴씨 문중에서 호를 지어 올린 적이 있는데, 이 보고를 받은

朴大統領은 "朴正熙란 이름 석자로 충분하다"고 당시 대변인에게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朴 大統領은 號를 쓴 적이 없다.

 
한 보좌관이 모 외국 대학에서 명예 博士 학위를 주기로 했다는
보고를 하니 朴大統領은 " 博士는 나와는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朴 大統領은 18년간 재임했으나, 그 흔한 명예 博士 학위가
하나도 없다.朴 大統領은 私信을 쓸 때는 절대로 '大統領

朴正熙' 라고 하지 않았다.

 
'朴正熙 拜'라고만 했다. 朴 大統領은 자신의 생일에 대해서도

무심했다. 그의 생일은 호적에 잘못 적힌 대로 알려져 한동안

생일이 아닌 날에 장관들이 축하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는 한동안 이를 굳이 고치려 하지 않았다. 號, 명예 博士,

생일, 직함 등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던 朴大統領은권위

적인 것들을 싫어했다.

 
그렇지만 그가 지도한 체제는 권위주의 체제로 불린다. 그는

특히 권력을 빙자한 군림을 증오했다. 그는 허례 허식도 싫어했다.

항상 淸貧한 마음자세를 죽을 때까지 유지한 분이었다.

 

그가 죽을 때 '허름한 시계를 차고, 벗겨진 넥타이 핀을 꽂고, 해진

혁대를두르고 있었던 것' 그래서 屍身을 검안한 군의관이 "꿈에도

각하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인간 朴正熙의 자연스런 眞面目

이었다.


號도, 명예 博士도 거부했던 그는 권력을 빙자한 군림(君臨)을
증오한 이였다.

 

 

 

출처 : 조 쿠먼
글쓴이 : 조 쿠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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