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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남이섬의 남이장군 묘

원고리 2014. 12. 12. 23:08

남이섬의 남이장군 묘

남이섬에는 남이장군 묘가 없다.  

남이섬과 남이장군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본다.

 

◈ 남이장군은 누구인가

    남이(南怡 - 1441 - 1468)는 태종 사위 남휘(南暉)의 장손이고 태종의 외장손(外長孫)이다.

    그는 서울에서 살았고  좌의정 권람(權擥)의 넷재딸과 혼인하였다. 1457년 17세의 나이로

    武科에 장원하여 世祖의 지극한 사랑을 총애를 받았다.  남이장군은 한국사에 있으서 가장

    비극적인 한 사람일 것이다. 그 비극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젊디 젊은나이에 탁월한

    경력을이루었지만 모반(謀叛)의 혐의로 처형되었다는 사실의 대비(對比)일 것이다 .

 

    남이느 본관이 의령(宜寧)으로 할아버지는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이고, 할머니는 태종

    (太宗)의 넷째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이며, 아버지는  군수 남빈(南玭)이다.

    또한 중요한 가무적인 배경은  그가 권람(權擥  1416 - 1465)의 사위 였다는 것이다. 권람은

   조선 초기 의 대표적인 학자인 권근(權近0의 손자이자 권제(權醍)의 아들로서 좌의정 까지

   오르고 정난(靖難)및 좌익(佐翼)1등 공신에 책봉된 당시의 가장 핵심적인 대신의 한사람이

   었다.

 

   태종의 외증소자이자 당대 최고 대신의 사위라는 화려한 사회적 배경에 힘입은 측면은 적지

   않았지마는, 남이(南怡)는 그 것을 넘어서는 훌륭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 가 문신 보다 훨씬

   낮은 대우를 받는 무신(武臣)의 길을 선택한 까닭은 분명치가 않다. 하지만 그는 그의 성향이

   무안의 기질이 농우한데, 이것이 결정적인  중요한 요인으로 자굥한게 아니가 한다.

   비극으로 끝나기는 하였지마는  그 뒤 화려한 전공과 출세가 보여주듯이 그 것은 자신의 능력

   을 촤대로 발휘할수 있엇던 현명환 선택아었다.

 

◈ 혼인(婚姻)  

    장호원 백족산(白足山)에 굴바위라고 부르는 바굴굴아 하나 있다.

   근처에는 절이 하나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 남이장군이 그 절을 망하게 한 괴수(怪獸) 지배의

   정기를 갖고 태어났다는 설화도 있고, 예날에 이절에는 수십명의 승려들이 수행을하고 있었는

   데 언제부터인가 안개가 끼는 밤이면 꼭 한사람씩 승려가 사라지고는하였다. 그러한 일이 그듭

   되자 승려들은 극정 끝에 한 사람씩 절을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나가 버렸는데....

 

   마침내 믿음이 짙은 스님한분만아 남았었다. 이 스님은 모두들 부처가 극락세계로 데려갈 것으

   로 믿고  그 자신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하여 마을의 친구들인 글방선생을 찾아갔다. 글방 선생

   은 다른곳으로 떠나기를 권하지만 스님이 듣지 않으므로  무명옷 한벌을 내어주면서 "내가 자네

   에게 바라는 청이니 이 옷을 입고가게나, 냄새가 나드라도  절대 벗지말고 입고 있으야하네"

   이튼날 글방선생은 친구의 안위가 궁금하여 절에 올라가 보니 절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찾

   아보니 굴바위앞에 크다란 지네 한마리가 나자바져 있고 그 목에는 자신이 친구에게 건네준

   무명 옷자락이 거려 있는것이다.

 

   옷에 칠하여둔 독한 담배진 때문에 스님을 삼킨 지네도 죽었던 것이다. 그 때 이상한 일이일어

   났으니 백족산 허리부근에 오색청롱한 구름이 감돌더니 구름에서 나온 상서러운 기운이 거

   서 얼마 떨어지지않은 개미실(충북 음성군 감곡면)남씨집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그 달무터 남

   씨 문중에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자라니 그 가 바로 남이장군 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므로 남이장군은 지네의정기타고나서 영특하다고 전해 지고있다.

 

◈ 성장과 활동  

   그러던 후 남이는 이시애(李施愛)난에서 세운전공으로 행호군(行護軍) 에 임명되고, 적개 일등공산과     의산군

   (宜山君)에 책봉된다.  이후 그는 북방에서 활ㅇ약이 계속된다. 이번의 대상은 건주위(建州衛) 여진(女眞)이

   엇다. 남이는  평안도선위사(平安道宣慰使) 윤필상(尹弼商)이 지휘한 토벌군에서 우상대장(右商大將) 으로

   주장(主將) 강순, 좌상대장 어유소와 함께 참전하여 만포(滿浦)부터 파저강(波猪江)을 공격하여 적의 우두머리

   이만주(李滿主)를 죽이고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적에 따라 그는 곱속히 승진된다. 이시애의 난이 종결되고 공조판서(工曺判書)에 임반년

   뒤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官)을 겸직하였으며 한달후에는 병조판서(兵曺判書)에

   발탁된다. 러나 이러한 이례적인 행운은 대체로 유동적이거나 불안한 상황에서 발생하여,불행한

   결과로 끝맺는 경우가 적지않다.  남이는 전형적인 그러한 사례라고 할수 이다.

 

◈ 역모(逆模)

    세조가 승하하기  13일전에 전격적인 兵曺判書 에 任命 되었던 南怡는 世祖가 죽고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마자 실각하였다. 예종은 즉위당일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발령

    하였다. 예종은 남이를 불편하게 생각하였고, 도한 훈신(勳臣)들인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새로운

   세력인 남이장군의 득세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남이는 한명회, 신숙주등 훈신(勳臣)들에 의해서 해직되어 겸사복장으로 밀려나게 되고, 겸사복장  

    은  병조판서가 지휘하던 100명 부대의 장 이었으며, 매우심한 죄천이었다. 남이가 대궐안에서

    숙식을 하던 어느날밤 혜성(彗星)이 나타난것을 보고 말 하기를  "혜성은 묵운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포치하는 현상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 에 평소 남이의 재능을 시기하던 유자광(柳子光)이 말

    을 엿듣고 남이가 반역을 꽤하고 왕에게 주청하였다. 이때 남이의 북정가(北征歌)를 고쳤더고한다.

 

   북정가(北征歌)

        白頭山石 摩刀盡    백두산돌은  칼갈아 다하고

        豆萬江水 飮馬無    두만강물은  말을 먹여없애리

        男兒二十 未平國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를 평정핮하지 못하면

        後世誰稱 大丈夫    후세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

 

     후일 유자광은 혜성이 나타났을 때 남이가 말한것을 가억해 두었다가 다음과같이 북정가의 한

    글자를 바꾸어 남이가 역모를 꽤하고 있다고 예종에게 모함하였다.

    男兒二十未平國을  男兒二十未國 으로 즉 사나이 스물되어 나라를 얻지못하면 으로 바꾸어

    역모를 한 것이다.

    그럼 유자광은 누구인가?  훈구파(勳舊派)의 중심인물 이었다.

 

 

 

    ◈ 남이섬의 남이묘는 허묘(虛墓)이다

        춘천의 남이섬에는 남이 묘역이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남이장군 묘역이있는데 잘 조성되어

        있다. 입구에는 홍살문도 세워저 있고 홍살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는 남이장군 추모비가 있다.

        신도비 개념으로 최근에 세운것이다. 그리고 뒤로는 문인석과 촛대석도 있고, 상석도 잘 갖추어

        저 있다. 이들 모두는 제대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봉분역시도 둘레석으로잘 조성하여저 있다.

        하지마는 이 모두가 밝혀지지 않은 전설에 의한 돌무덤을 현실화 한 것이다.

 

       남이의 절정기는 1467년 이시애 난을 평정한 때이다. 그는 강순. 어유소와함께 토벌군 대장이

       되어 전공을 세워 적개공신 1등에 오르고 의신군에 봉해진다. 그는 세조 14년인 1468년 병조판서

       가 되었으나, 예종이 즉위하고 그해 10월 유자광의 밀고로 국문을 당해 거열형(車裂刑)에 처해

       진다.  거열형이란 두 수레가 양쪽에서 끌어 사람의 사지(四肢)를 찢어죽이는 형벌이다.

       그 뿐아니라 그의 목은 7일동안 저자거리에 효수(梟首)하게 하였다.

 

       사실 이 반역 죄인은 그 후손들이 묘(墓)를 만들수가 없다. 그러니 남이장군의 묘는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리 산 145번지에 있다.  남전리는 남이장군의 외가로 남양홍씨의 세거지

       (世居地)이다. 그러므로 남이의 시신은 외가 사람들에 의해 수습되어 남전리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묘를 공식적으로 는 박힐수없었고, 그로인하여 여기저기에 남이묘가 조성

       되었다고 본다.

 

       현재 남이섬의 묘는 허묘(虛墓)로 남이선에 옛날부터  남이장군 묘라고 전해지는 돌 무더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이섬이라는 이름도 그 때문에 생겨났다는 설이있다.

       섬의 북쪽 남이나루 군처에 돌무더기가 있었고 이 돌을 옮기거나 집으로 가저가면 액운이 낀다

       는 전설이 있었다. 1965년 민병도(閔丙燾)학자가 남이섬을 매입한후 남이장군의 넋을 기리고자

       봉분을 만들고, 추모비를 새우면서 공식적으로 남이장군 묘라고 정하게 되었다.

                                                                        (참고자료 ; 백운봉 한뿌리 역사관에서 발췌)

        

남이장군의 묘는 '남이섬'에 없다

 

 

감사 합니다.

촬 영 ; 2014. 11. 9.

글 / 편집 ; 푸른솔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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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호수의 작은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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